민노아 선교사와 한국 찬송가

민노아 선교사와 한국 찬송가

[편집자주] 지난 1900년 충북 청주 땅을 밟은 벽안의 외국인 선교사 프레더릭 S. 밀러(한국명 민노아). 청주를 사랑해 33년 동안 이 곳에 머물며 경기 남부를 포함한 우리나라 중부권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많지 않다. 
충북CBS(본부장 변이철)는 청주성서신학원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공의를 전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린 '충북선교의 아버지 민노아 선교사 바로알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민노아 선교사의 생애와 선교의 족적, 신앙 등을 소개하는 글을 연재한다.

F. S. Miller(민노아) 선교사는 한국 찬송가 음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시인의 재능과 한국의 운율을 아는 탁월성을 가지고 장로교와 감리회의 연합공의회 찬송가의원으로 활동했으며 한국교회 초기 찬송가 번역과 창작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1937년 10월 6일 그는 청주에서 뇌빈혈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사랑한 청주에 묻혔다. 그가 죽은지 며칠 후 해리 로즈(Harry Andrew Ghodes)는 F. S. Miller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민노아는 끊임없이 저술 활동에 참여해온 선교사중 한 명입니다. 그의 저서 및 번역서는 거의 40편이나 됩니다. 그는 한국교회가 지금도 부르고 있는 많은 찬송가를 선교 활동 초기에 번역했습니다. 그가 음악가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운율을 알았고, 시인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는 또한 한 국에 있는 선교사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한국 이야기 작가입니다."
 (미션필드, 1937. 11)

그가 직접 작곡한 찬송가는 없지만, 찬송가 편찬과 보급에 기여하며 한국 교회의 예배 음악이 체계적으로 정착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 한국 최초의 성가대 "백의소년 성가대" 
 
F. S. 밀러 선교사가 1892년 조선에 입국한 후 서울 선교지부에 배치되어 조선어를 공부하며 마펫이 운영하던 ❮예수교학당❯을 이어받았다. 그는 교명을❮민로아학당❯으로 개칭하고 자신의 교육 방침대로 보통반과 특별반(실업반)의 새로운 학제를 만들어 실용교육 발전에 이바지한다. 금강산, 원산 등 현장 지리 답사를 교육과정에 포함시켰고 학생들도 46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때 서병호, 송순명, 김규식 등 훗날 새문안교회 지도자들이 많이 공부하였고 민족지도자 안창호(安昌浩) 선생도 이 시기에 민노아 선교사의 지도를 받게 된다.

1894년 밀러는 부인 안나 밀러와 함께 이 학당의 학생들로 ⟪백의소년 성가대⟫를 조직한다. 이 성가대는 장로교 최초의 성가대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밀러 부부의 헌신으로 이루어졌다. 이 성가대는 새문안교회 예배는 물론 전도 활동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5월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이⟪백의소년 성가대⟫ 소년들이 궁궐 앞 과거(조선의 마지막 과거시험)시험장 앞에서 찬양으로 전도하며 『권중회개』 3,000권을 배포하기도 하였다.
민노아와 백의소년 성가대. 청주성서신학원 제공민노아와 백의소년 성가대. 청주성서신학원 제공2. 찬송가 작사 ∙ 번역 ∙ 편집의 공로자
 
한국 최초의 잔송가는 감리교에서 1892년에 발행한 『찬미가』이다. 이 찬송가는 악보가 없이 임시로 발행한 가사 판이고, 개별적으로 불리던 찬송가 27곡이 수록되었다.
 
1895년에는 81곡을 수록한 제1판이 발행됐고, 이후 1905년 제8판까지 몇 년 간격으로 계속 증판되었다. 1894년 언더우드는 찬미가보다 4배 많은 117곡이 수록된『찬양가』를 발행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공인받지 못했고, 장로교 안에서도 갈등의 요인이 되었다.

1895년 북장로교회 선교부가 새로운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찬셩시』를 발행하였는데, 이것이 장로교의 공인 찬송가가 되었다. 그리고 1907년 제12판이 나오기까지 계속 증판되었는데, 그 중 제9판(1905년)과 제12판(1907년)만 악보 판이고 나머지는 가시 판이다.

이 제9판 『찬셩시』에 민노아 선교사가 번역한 찬송가가 26곡 수록되어 있다. 제9판에 수록된 민노아 찬송가는 1908년에 발행된 가사 판과 1909년의 악보 판에도 모두 수록되었으며,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21세기 찬송가』에도 17곡이나 수록되어 있다.
 1908년 장로교,감리교 연합찬송가                              청주성서신학원 제공1908년 장로교,감리교 연합찬송가 청주성서신학원 제공3. 민노아의 찬송가 번역과 창작 찬송가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몇몇 한국 교인들은 중국어 찬송가를 한국어 발음으로 부르기도 하고, 번역하여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식 표현이 너무 많아서 학식이 있는 한국인들조차도 가사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은 한동안 지속되다가, 1880년 말부터 영어 찬송가를 번역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찬송은 예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순서여서 찬송가 제작의 필요성은 점점 커졌다.
 
앞서 살핀 것 같이 장로교 자체로 찬송가 발행이 있었지만, 한국교회 대표적 두 교단인 장로교와 감리교는 1905년 연합찬송가를 만들기로 결의하고, 감리교는 벙커 선교사가, 장로교에서는 베어드 부인과 민노아 선교사가 편집위원으로 선정되었다.

몇 년 간의 작업후 1908년 최초의 연합찬송가인 『찬숑가』가 발행되었고, 악보 판은 이듬해 발행되었는데, 262곡이 수록되었으며, 여기에 민노아가 번역하거나 창작한 찬송가 26곡이 실려 있다.

이것은 1930년 장로교와 감리교가 따로 찬송가를 편찬할 때까지 20년간 사용되었으며, 대부분의 가사가 거의 바뀌지 않은 채『21세기 찬송가』에 수록될 만큼 한국 찬송가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찬송가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외국어로 쓰인 글을 자국어 번역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자국어로 쓰는 글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더 어렵다.

1894년 『찬미가』서문에 "찬송가 한 편을 번역하는데 며칠을 쩔쩔매닥 겨우 운율에 맞게 가사를 넣고, 때로는 운율에 맞지 않는 번역을 할 수 밖에 없었으며, 마침내 한국교회 안에서 찬송가 작사자들이 나와야 한다고 결론지었다"고 하였다. 음절수을 맞추면서 영어 가사 의미를 다 담아서 번역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번역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운율을 맞추는 것이다. 영어 찬송가의 강약과 한국어의 강세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순이 정 반대이고, 어미가 있어 운율을 맞추기 어려워 찬송가 시(詩)를 한국어 가사로 번역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김인식, "Translation of Song into Korean)

1903년 민노아 선교사는 「우미인가」라는 가사(歌辭)를 분석한 내용을 발표했다. ("A Korean Poem." The Korean Review) 한국어를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로마자로 표기하기도 하고, 영어로 번역해 주기도 하면서 가사 내용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소개한다.
 
 민노아 선교사는 한국교회 초기 찬송가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쓴 글 속에 이런 회고를 하였다.

"어떤 집을 바라보고 서 있을 때, 건물 구조 안에 세밀한 부분에 기울인 생각 과 노력과 관심의 양을 충분히 인식하기는 어렵다. 이와 마찬가지로 찬송 가의 음절과 음 하나하나를 따져보고 신중하게 선택하는데 들어간 노동시 간을 아무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21세기 찬송가』에는 한국어로 작사된 찬송가가 150장 남짓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 5곡이 민노아가 작사한 찬송이다. 놀랍게도 가장 많은 한국어 찬송가 작사자는 한국인이 아닌 바로 민노아 선교사이다.
 
4. 민노아 찬송가의 특징

민노아 선교사는 찬송가를 통한 교육과 전도에 관심을 가졌고, 그가 찬송가를 번역하고 창작하고 찬송가 편찬에 노력을 기울인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교육과 전도였다. 한국교회 초기에 찬송가는 한국인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고, 신앙생활에도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민노아는 간파하였다. 아래에 인용된 "몇몇 작가"는 바로 민노아 선교사이다.

"많은 기독교인 신약성경보다 찬송가집을 먼저 샀고, 여성들은 종종 찬 송가를 읽기 위해 한글을 배웠다. 가사를 암기하고 있는 찬송가를 통해 서 읽는 법을 배우는 것이 신약성경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더 쉬워서, 찬송가 집은 그들의 인기 있는 한글 읽기 교재가 되었다. 이것을 알아차린 몇몇 작가 는 성경의 일부 구절을 운율에 맞게 가사로 만들었다."
 
따라서 민노아 선교사가 작사 또는 편집한 찬송가는 주로 성경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204장 "주의 말씀 듣고서"
427장 "맘 가난한 사람"
451장 "예수 영광 버리사"
588장 "공중 나는 새롤 보라"
이 모든 찬송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작사된 것들이다.

또한 그가 번역한 찬송가들의 주제는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전도에 관한 것들이다. 이것은 복음성가(Gospel Song)의 일반적인 주제이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민노아 선교사가 찬송가를 통해 성경 교육과 전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찬송을 창작하고 번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노아선교사 찬송가비, 충북선교사 묘역  청주성서신학원 제공민노아선교사 찬송가비, 충북선교사 묘역 청주성서신학원 제공마치면서
F.S. Miller(민노아) 선교사는 찬송가를 직접 작곡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초기 한국교회에서 사용한 찬송가의 번역, 편찬, 보급에 기여하면서 한국 찬송가 발전에 빼놓을 수 없는 1등 공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찬송가 번역, 편찬, 보금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예배음악의 발전, 찬송가 보급을 통한 신앙교육과 전도, 신앙의 토대를 세우는 문맹퇴치와 신앙의 문화화에 큰 역할을 하였고, 서양 찬송가 번역을 넘어 한국인의 정서와 한국인의 운율을 고려한 한국 찬송가 작사자로 가히 한국 찬송가의 기초를 놓은 "한국교회"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공로자이다.

추천기사

스페셜 그룹

청주 많이본 뉴스

중앙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