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지난 1900년 충북 청주 땅을 밟은 벽안의 외국인 선교사 프레더릭 S. 밀러(한국명 민노아). 청주를 사랑해 33년 동안 이 곳에 머물며 경기 남부를 포함한 우리나라 중부권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많지 않다. 충북CBS(본부장 변이철)는 청주성서신학원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공의를 전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린 '충북선교의 아버지 민노아 선교사 바로알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민노아 선교사의 생애와 선교의 족적, 신앙 등을 소개하는 글을 연재한다.1. 민노아 선교사가 청주에 도착한 여정"충청 선교의 아버지"라 일컫는 선교사 민노아(Frederick S. Miller, 1866-1937)는 미국 북장로회 파송으로 아내 안나 레이네크(Anna Reineke)와 함께 26세인 1892년 11월 15일 조선에 도착했다. 그는 조선에서 선교를 시작했는데, 그 이듬해인 1893년 1월에 '예수교학당'(경신학교 전신)의 학당장을 맡았다. 그는 연동교회의 창립에 초석을 놓았고, 그의 첫 사역은 주로 교육사역이었다.
<젊은 시절 민노아 선교사> 이때 도산 안창호를 길러낸 사람이 민노아선교사이다. 안창호는 17세(1895년)에 민노아학당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조교로 활동했으며, 민노아와 레이네크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 그들의 주선으로 결혼, 그후 미국 유학의 길을 열어주었다.
1897년 10월 선교본부의 정책으로 폐교하였다. 1897년 선교회의 결의로 문을 닫게 될 때까지 5년간 학교를 이끌었다. 이때 밀러는 보통반과 특별반 제도를 도입해 실용적인 교육을 시행하고, 자신의 교육 방침에 따라 학교를 운영하였다.
밀러는 재직중이던 민노아학당이 폐교되자 연지동 일대에서 노방전도를 실시하였으며, 1897년에는 황해도 지역 선교목사를 지명되어 선교했다. 또한 그후 경기 남부지역 선교사역을 담당하였으며, 1900년부터 충북 청주지역에 최초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2. 충청 선교의 시작민노아 선교사는 청주 선교지부로 이전하기 직전까지 서울을 시작으로 평안도와 충청도, 강원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오가며 순회전도 사역에 힘썼다. 서울과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순회 선교사역을 하다가 1900년부터는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에서 김흥경 조사와 청주 시장에서 노방전도, 조치원에서 전도하였다.
민노아 선교사는 아직 장로교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 경기남부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선교하기 시작한다. 당시 청주는 경기도와 강원도,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며, 청주 그 자체만 하더라도 한강 이남에서 몇 째 안 가는 5일장이 열리고 5일마다 5000명이 운집하는 우시장이 열리고, 각각 한 가구를 대표한다면 적어도 2만 5천 명에게 복음을 전하고, 의료사업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이 선교사업에 있어서 무관심한 지역이라고 여겼다. 민노아의 관심은 기본적으로 이런 것에 놓여 있었다. 무시되고 방치되고 소홀히 여기는 부분! 이것이 한국인에 대해서, 한국인의 일에 대해서, 그리고 선교사업에 있어서 늘 민노아 선교사가 세심하게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점이었다. 신학적인 면에서, 지정학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었기 때문에 민노아선교사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지 아니하고 34년간 한 곳에 머물면서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다한 것이다.
3. 청주의 랜드마크 "탑동양관 건축의 역사"1900년 12월, 조사 김흥경과 함께 청주시장에 답사와 전도를 위해 내려왔다가 놀라운 소식을 접한다. 오천보, 문성심, 오삼근 등이 죽산 둠벙(둔병)리교회 사경회에서 참석하여 예수를 믿고, 이들이 돌아와 자생적으로 교회를 세웠다는 말에 크게 고무된다. 그는 조사 이찬규를 보내 오천보의 집을 매입하여 세운 교회가 충북 최초의 교회인 신대교회이다.
민노아 선교사는 충북 사람들의 심성을 귀하게 보았다. 조용하고, 점잖을 뿐 아니라, 학식이 있고, 배움에 열의가 있는 것을 느끼고 청주 선교본부의 설립을 강청하여 1904년, 아직 선교비 지원이 되지 않았는데도 자비를 들여 무심천이 내려다보이고, 청주 시장거리와 우시장을 내려다보는 남쪽 탑동 언덕 산지 5만여 평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1900년대 초 청주의 풍경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청주를 가로지르는 무심천변은 농지와 초가뿐이었을 때, 청주 선교본부인 '양관'을 짓기 시작하여 첫 번째 건물이 1906년 여름 완공된 지 119년이 되었다. 그 후 1932년까지 6채의 양관이 세워졌다. 현재 일신학원 안에 4채, 그리고 밖에 2채 총 6채가 보존되어 있다.
1905년부터 청주시 탑동 야산을 26원에 사들여 나무를 베고 청주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서양식 양관을 짓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양관(洋館)'이다. 산에 나무가 얼마나 크고 많았는지 장정 150명이 2주 동안 도끼로 나무를 잘랐고 벌목한 나무를 옮기는데도 3백 명의 인력이 동원됐다고 한다. 건물을 지으면서 기와와 벽돌은 그곳에 있는 흙을 구워 만들어 사용했으며, 대들보는 민영천의 야산에 있던 소나무를 이용하였고, 유리창 문을 아취식으로 내었을 뿐, 지붕이 조선식 기와지붕이고, 처마장식과 주춧돌 등도 전통 한옥과 흡사하여 양관 중에서 가장 한국 풍을 담고 있는 서양식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1910년, 1911년, 1921년, 1932년까지 선교사 사택, 병원, 성경학교 등이 건축되어 지역선교와 의료 봉사의 본거지로 이용되었다.
<1905-6년 지어진 포사이드 기념관, 청주선교 기지> 1904년 밀러 목사가 처음 들어와 기독교 문화를 정착하고, 1906년 청주 대홍수 때에는 수백명의 이재민들의 피난처가 되었고, 1907년 계군 목사가 다음해 국유치(鞠有致) 목사가 들어와 많은 선교 활동을 펼쳤다. 1914년 노관·지도 의사 부부가 '소민병원'을 차리고 병고에 시달리는 주민들에게 의술을 펼쳐 주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양관 건물에서는 기독교 선교와 근대 교육, 병원 업무까지 병행하며 주민 계몽과 보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양관은 본래 선교사들 거주와 사무실용으로 만들었으나 생활이 어려운 아이들과 문맹인 성인들의 배움터로 많이 활용되었다. 그러나 1914년 계군 목사는 결혼 후 건강이 나빠져 청주를 떠났고 이후 소열도 선교사, 부례선(富禮善) 선교사, 한부선(韓富善) 선교사 등이 양관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충청북도는 1983년 탑동 양관을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제133-1호"부터 "제133-6호")하였으며, 예장통합 총회에서도 2012년 이들 양관에 대하여 "한국기독교사적 9호"으로 지정하였다.
4. 민노아 선교사의 충청도와 청주의 선교사역1901년에 민노아선교사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충청북도에서 사역하도록 정식 임명을 받았다. 이 당시 신대리 예배공동체에는 학습교인 16명이 주축이었는데, 예배공동체 창립이후 11개월 동안 이들이 보여준 신앙의 진보가 경기 남부지역 교인들 6년의 신앙생활보다 훨씬 앞섰다. 민노아는 신대리 교인들의 교육수준이 높고 신실하다는 점을 파악했다. 교인들은 거의 매일 밤 모여서 기도하고, 성경공부를 하고, 기독교 신문을 읽었다.
그 이듬해(1902년) 여름에 민노아와 김흥경이 신대리 예배공동체를 방문했다. 본격적인 문서 선교를 위해 전도지를 가져갔다. 교인 윤홍채가 그 전도지를 가지고 보은군 내북면 도원리, 노티리, 회북면 법주리, 괴산군 청천면 공림리 등지에서 배포하며 신앙 간증을 했다. 법주리와 공림리에서 신앙공동체가 생성되었다. 오천보·이춘성 부부는 신대리 예배공동체의 기둥이었다. 부부가 열성을 다해 복음을 전했다. 이춘성은, 나중에 민노아의 지원으로 1910년 평양의 신학교에서 수학했고, 그리고 충청북도에서는 물론이고 충청남도(아산, 직산, 홍성, 당진, 예산, 온양)에서도 전도하며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민노아선교사는 1902년부터 청주의 선교기지 필요성을 요청했다. 민노아 선교사는 충북 사람들의 심성을 귀하게 보았다. 조용하고, 점잖을 뿐 아니라, 학식이 있고, 배움에 열의가 있는 것을 느끼고 청주 선교본부의 설립을 강청하여 1903년 잠정적으로 선교기지 설립을 허락하였고, 1904년 선교사 연례회의에서 새로운 선교기지의 필요성에 대한 검토가 있었으며, 그 해 10월 청주선교기지 부지를 만련하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가 이루어졌다. 민노아 선교사는 1904년 청주에 정착하면서 선교지부의 땅을 매입했다. 금천동 언덕 탑동의 동산을 매입했다. 이때부터 1930년경까지 모두 15차례에 걸쳐 매입한 땅이 약 5만 여 평이었다. 그리고 1905년 6월 민노아 선교사 부부, 세 명의 자녀들, 조사 김흥경이 청주로 자리를 옮겼다. 이것으로 청주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된 것이다.
5. 경기남부와 충청지역에 민노아선교사가 세운 교회들충남 홍성군 홍주성 서문 밖에 자리 잡은 홍성제일교회도 1900년, 민노아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서해안 지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이며, 지역 내 많은 교회를 육성한 어머니 교회이기도 하다. 죽산교회는 충북 첫 교회인 청주 신대리교회의 모교회나 다름없다. 죽산은 구한말 한양서 경상도로 통하는 교통 요지였다. 죽산교회도 민노아 선교사에 의해 설립됐다. 민노아 선교사는 둠벙(둔병)리에서 사경회를 인도했다. 이 사경회에 청주 사람 오천보, 문성심, 오삼근 등이 은혜를 받고 신대리교회 공동체를 시작한 것이다. 1901년 세워진 청주 신대교회, 1903년 세워진 괴산 제일교회에 이어, 1904년 11월 5일 시작된 청주읍교회는 충북지역 세 번째 개신교이지만 '충북의 어머니 교회'로 통하고 있다.
<충북의 모교회인 청주제일교회>청주제일교회 출신 선교사와 목회자, 신자 등이 주변 지역 교회들을 보살피거나 전도해 묵방리, 화죽, 문의, 쌍수, 청안교회, 청주 제2교회(지금의 중앙교회) , 1938년 대전제일교회 등을 세우는 등 초기 충북과 중부권 교회의 매개체였다. 안성시 모교회인 안성제일교회도 민노아 선교사가 1902년 12월 설립했다. 이 교회는 안성지역 최초의 유치원을 설립해 많은 기독교 인재들을 배출했다.
충주지역에는 미 북장로교의 밀러선교사(한국명 민노아) 등의 노력으로 1900년 초부터 교인들이 생겼다. 충주시 최초의 교회는 교현동의 충주제일교회로 1905년에 창립됐다. 충주뿐 아니라 충북지역의 모교회라고 할 수 있는 교회다. 1906년 조치원장로교회(기장), 1907년 청안교회, 1909년 덕촌교회 개척 등 수많은 교회를 개척했다.
1920년 우암교회(외덕교회) 창립 이후 민노아 선교사는 봄가을로 세례문답을 위해 우암교회를 방문했다. 1925년 조치원 교회, 추풍령, 홍성, 안성, 죽산, 대전, 경상도 상주까지 교회 설립하는 일을 지도하였다. 충청북도 충주, 괴산, 보은, 옥천, 영동, 경기도 안성, 죽산, 용인, 충청남도 홍성, 조치원, 대전, 경상도 상주, 추풍령 등지의 40여 교회들이 민노아 선교사의 숨결로 세워진 교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