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노아 선교사와 청주 근대화

민노아 선교사와 청주 근대화

민노아(F.S. Miller) 선교사는 누구인가?
중부권 선교의 개척자
찬송가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의 작사자
청주 양관 건축자
청주 최초의 근대학교 '청남학교', 청주 최초 근대병원 '소민병원'의 설립자

[편집자주] 지난 1900년 충북 청주 땅을 밟은 벽안의 외국인 선교사 프레더릭 S. 밀러(한국명 민노아). 청주를 사랑해 33년 동안 이 곳에 머물며 경기 남부를 포함한 우리나라 중부권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많지 않다. 충북CBS(본부장 변이철)는 청주성서신학원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공의를 전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린 '충북선교의 아버지 민노아 선교사 바로알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민노아 선교사의 생애와 선교의 족적, 신앙 등을 소개하는 글을 연재한다.


민노아(Frederick Scheiblin Miller)는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로 1892년 11월 15일 입국하여, 서울에서 11년, 1904년부터 1937년까지 꼭 33년간 청주에서 사역하였다. 청주주재 선교사로 청주선교부(Mission Station)를 설립하고, 청주 선교부를 이끌며, 청주를 중심한 중부권 선교와 근대 교육기관 설립, 근대병원 설립, 문맹 퇴치를 위한 여성교육,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금주운동을 비롯한 계몽운동 등, 청주 근대화와 교육도시로서의 명성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청주 근대화의 기수(旗手)이다.
밀러선교사 ( F.S. Miller, 민노아)밀러선교사 ( F.S. Miller, 민노아)
민노아(F. S. Miller)는 1866년 펜실베니아(Pennsylvania)주 피츠버그(Pittsburg)에 태어났고, 피츠버그(Pittsburg)의 국립고등학교와 피츠버그대학(1889)을 거쳐 뉴욕 유니온신학교를 졸업(1892년)하고 목사로 임직한 후 1892년 11월 15일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본부 해외 선교부의 임명을 받아 한국에 왔다. 기록에 의하면 한국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가 첫 번째 안식년에 미국 유니온신학교를 방문하여 자신이 세운 "예수학당"을 맡길 후임자를 물색하여 초청했다고 한다.

민노아의 서울 사역

민노아에게 처음 부여된 임무는 서울 선교부 직원으로 교육사역(1892-97)이었고, 그다음에는 복음사역(1896-1905)이었다. 
그는 언더우드가 세운 예수교학당(現, 儆新學校)을 '민노아학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제3대 학당장에 취임하였다. 민노아는 이 시기 10대였던 도산 안창호를 가르쳤다. 만난 지 반년 만에 세례를 주고, 선진 학문을 가르쳤으며, 유학 준비를 돕고, 결혼까지 주선하여 주례 후 유학의 길을 열어주었다.
서울본부의 방침에 따라 1897년 10월에 민노아학당이 폐쇄되자 대한기독교서회 편집위원, 1894년부터 상임성서실행위원회(PEBC: 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 위원으로 한글성서번역에 참여하였으며, 1903년에는 회장으로 1905년까지 소위원회를 이끌었다.
또한 1905년에는 장로교 대표로 장∙감연합찬송가 편집에도 참여하여, 그가 직접 작사한 찬송가를 포함하여 총 26곡을 수록하였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 한글로 지어진 찬송가 최다곡 수록자이기도 하다. (5곡: 96장, 204장, 427장, 451장, 588장)
 
청주선교부를 설립하다.

그후 민노아는 서울 연동교회 설립의 기초를 놓았고, 장로교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던 경기 남부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선교를 시작한다. 용인(백봉교회), 안성(안성제일교회), 죽산(죽산교회) 등지에서 교회를 세웠고, 1900년 봄에는 당시 한강 이남의 3대 시장이던 청주읍성을 방문한다. 충청권 선교를 담당하던 침례교 엘라딩 선교회가 재정 사정으로 손을 떼었고, 남장로교회도 충청권 선교에 여력이 미치지 못했으며 감리교회가 청주순회 전도를 막 시작하는 시기였다.
민노아는 기다렸다는 듯 청주에 입성하여 첫 번째 방문에 감동적인 소식을 듣는다. 자신이 죽산 둔병리교회에서 부흥회를 할 때 참석했던 몇 명이 예수를 믿고, 청주에서 교회(청주 최초의 교회인 신대교회)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민노아는 자신이 사역할 곳이 청주라는 확신을 갖는다. 신대교회를 중심한 교회의 부흥과 도청소재지의 이전 계획, 전기 가설 등 발전 전망은 물론 특별히 청주사람들의 심성을 좋게 보았다. 점잖고, 학식이 있고, 배움에 대한 열의가 있고,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점등을 들어 선교부 추가 설치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그리고 1901년부터 본격적으로 김흥경 조사와 함께 청주선교를 시작한다.
그리고 1904년 임시허가를 받자마자 본부의 지원이 없는데도 자비를 들여 15회에 걸쳐 청주읍성이 내려다보이는 탑동 언덕을 중심으로 5만5천 평의 임야를 사들인다. 그리고 1905년 가족을 이끌고 청주로 이거(移居)하여 1906년 선교본부로 사용할 첫 번째 양관을 건축하였다.
이것이 청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다. 그후 1910년부터 32년까지 총 7동의 양관을 건축한다. 이 양관은 청주선교부 및 성경학원, 선교사 사택, 청주 최초의 근대병원인 소민병원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당시 청주읍민들의 눈에는 근대화의 상징이요 일제의 침탈로 상심한 시민들의 마음에 희망을 주는 랜드마크가 되었다.

1906년 준공된 청주 1호 양관: 포사이드 기념관, 충북 지방문화재 133호1906년 준공된 청주 1호 양관: 포사이드 기념관, 충북 지방문화재 133호민노아와 청주 최초의 근대학교 : '광남학교'

청주 최초의 근대학교인 광남학교(청남학교의 전신)는 1904년 11월 1일 방흥근의 집에서 시작됐다. 청주의 공립학교인 청주보통학교가 설립됐던 1908년보다 4년 앞선 것이다. 민족적 기운이 팽배하던 시기, 방흥근, 김태희, 김원배 등은 구국의 이념을 갖고 '광남학교(廣南學校)'를 설립했다. 매년 20여명 안팎이 입학해 100여명의 학생이 있었고, 3~4명의 교사가 학생을 가르쳤는데, 1904년 청주읍교회가 세워지면서 민노아선교사가 광남학교를 맡아 운영하게 되었다.
1908년 청남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청주를 중심으로 청남학교(淸南學校)와 △괴산 청천교회에 '청동학교(淸東學校)' △신대교회에 '청서학교(淸西學校)' △묵방교회에 '청북학교(淸北學校)' 동서남북(東西南北)에 기독교 학교를 세우고 1909년 정식 인가를 받아 보통교육과정 교육을 시작했다. 문명퇴치와 농촌계몽을 펼쳤으나, 역점은 유능한 한국인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였으며, 나라사랑과 민족자주의식을 고취했다.  
교사(校舍)로 사용되었던 망선루: 청남학교 개교 30주년 기념사진(1935.8.19.)교사(校舍)로 사용되었던 망선루: 청남학교 개교 30주년 기념사진(1935.8.19.)1906년 청남학교에 입학했던 배민수 목사는 "선생님들이 찬송가와 애국적인 노래들을 가르치며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고 용기를 북돋우셨다"고 회고했다(배민수자서전 39쪽). 일제가 한글 말살정책이 펼치던 1932년에는 최현배 선생을 초청하여 7일 동안 한글강습회를 열기도 하였다.
1936년 신사참배령은 더욱 강화됐고, 교감 최창남은 민족교육이 중단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학교 문을 닫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민족의식이 강했던 청남학교 학생들은 신사참배 불응에 나섰고, 정규태, 정순경 선생은 구속되고, 재학생 박종렬(청주 서남교회 개척목사), 강병찬 등은 감금 당했고,
청주읍교회 손현수 장로(훗날 보은군수역임)도 수감됐다.

최현배 선생 초청 한글강습회(1932년)최현배 선생 초청 한글강습회(1932년)신사참배 반대를 천명했던 교장 소열도(T.S. Soltau, 1921~1936 교장재임) 선교사와 정규태, 정순경 선생은 강제 퇴직당하고, 청남학교도 1936년 10월 12일 강제 휴교 처분을 당하고, 교사와 선교사가 떠난 주인 없는 학교는 1938년 현 상당구 영운동으로 이전(移轉)하였고, 1943년 일제에 의해 국가에 강제 귀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밀러선교사가 설립한 중부권 교회들

민노아의 선교 지역은 충청권 전체였다. 그리고 당시의 지역과 교통의 중심에 교회를 세웠다. 충주, 홍주, 청주, 괴산, 보은, 옥천, 영동, 상주와 추풍령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이른다. 충남 홍성군 홍주성 서문 밖에 자리 잡은 홍성제일교회도 1900년, F. S. 밀러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죽산교회도 F. S. Miller 선교사에 의해 설립됐다. 죽산교회는 충북 첫 교회인 청주 신대리교회의 모교회나 다름없다.
민노아 선교사가 둔병리에서 사경회를 인도했을 때 이 사경회에 청주 신대리 사람 오천보, 문성심, 오삼근 등이 참석하였다가 예수를 믿고 신대리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1901년 세워진 청주 신대교회, 1903년 세워진 괴산 제일교회에 이어, 1904년 11월 5일 시작된 청주읍교회는 충북지역 세 번째 개신교이지만 '충북의 어머니 교회'로 통하고 있다. 청주제일교회 출신 선교사와 목회자, 신자 등이 주변 지역 교회들을 보살피거나 전도해 묵방리, 화죽, 문의, 쌍수, 청안교회, 청주 제2교회(지금의 중앙교회) , 대전제일교회 등을 세우는 등 초기 충북과 중부권 교회의 매개체였다. 조치원, 추풍령, 홍성, 안성, 죽산, 청주 등지의 교회들도 그의 숨결로 세워진 교회들이다. 1907년 독노회에서 노회를 분립하기 위해 시작된 1911년 경기·충청 노회의 초대 노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청주를 사랑한 사람, 청주에 묻히다.

청주선교부는 1904년에 개설되어 민노아 선교사의 지도력 아래 1972년까지 약 70년간 52명의 선교사가 주재하면서 근대교육과 근대 의료, 여성교육과 근대계몽운동 등 근대문화와 신문명의 전달자로 역할을 다하였으며, 청주의 남쪽 탑동 언덕에 6동의 한양절충식 근대건물인 탑동양관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청주 양관은 일신학원 교정에 4채, 밖에 2채가 남아 있다청주 양관은 일신학원 교정에 4채, 밖에 2채가 남아 있다그는 1936년 12월에 만 70세로 정년 은퇴하고 자녀들이 사역하던 필리핀과 중국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와 1937년 청주에서 뇌빈혈로 별세하였다. 한국에서 선교한 지 45년째 되던 해, 그의 첫 번째 아내와 두 아들이 양화진에 묻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언에 따라 신고 있던 신발 그대로 입고 있던 외투 그대로 관 속에 들어가 그가 사랑하던 청주 금천 동산에 묻혔다.
그는 문명의 후진국이었던 한국을 '품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보급에 늦어진 탓'이라고 애써 변명해 주며, 한국인 사랑에 앞장섰고, 특별히 선비의 고장 청주를 자신과 잘 맞는 성품을 가졌다며 일생 사랑하며 그의 청춘과 일생을 다 바쳐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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